[박샘의'어쩌다 마주친 미술'6] 이제, 이순신 장군을 풀어드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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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용
기사입력 2018-01-08 [00:21]

“42년 만에 대대적인 수리를 하는 이순신 장군 동상이 시민들의 높은 관심 속에서 14일 광화문을 떠나 경기도 이천의 공장으로 향했다.”

 

▲  이순신 장군 동상이 42년만에 대대적인 수리를 하기위해 공장으로 향하고 있다  (2010년 11월 14일 뉴스) © 오산시민신문

 

14일 서울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이 전면 보수, 보강 작업을 위해 철거되고 있다. 이순신 장군 동상은 보수작업을 마친 뒤 12월 22일에 새로운 모습으로 공개될 예정이다. (2010년 11월 14일 뉴스)

 

지금으로부터 칠 년 전인 2010년 11월 14일에 거의 모든 방송국에서 방송된 내용이다. 이어 이동 시간이나 투입된 장비, 무진동 차량에 의한 이동 방법과 수리작업의 진행과정까지 상세히 소개했다.


이순신 장군 동상은 1968년 4월 광화문에 세워진 이후 42년 만에 ‘광화문 밖’으로 이동하게 된 셈이다. 이순신 장군 동상은 이천에서 42년 만에 뼈대를 새로 세우고 동상의 구조적 안정성을 보강하고자 내부에 세로 버팀재를 넣고, 스테인리스 소재 가로 버팀재를 지그재그로 설치했다. 내시경 검사 결과 척추 격인 세로 버팀재가 없고, 형상이 찌그러지지 않게 가로로 받쳐주는 철봉 한 개만 있는데 그마저도 상당 부분 부식돼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구조 보강과 수리가 끝나고 동상 표면의 부식과 오염을 깨끗이 제거하고서 색을 내고 대기 오염에 손상되지 않도록 야외 조형물 전문 왁스로 광택을 냈다. 1968년에 제작할 때 기술적 문제로 못한 내부 접합부위 용접까지 했다. 이렇게 여기저기 갈라지고 깨진 세월의 흔적을 지우는 대수술을 받은 장군의 동상은 같은 해 12월 22일 원위치로 복귀되었다.


그러면 왜 이순신 장군의 동상은 42년밖에 안 되었는데 이다지도 대규모 수술을 받아야만 했을까?
그 해답은 2010년 11월에 1966년부터 1968년까지 장군상 건립에 참여했다가 보수를 위해 서울시가 다시 불러 모은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서 알아차릴 수가 있다.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동상은 흙으로 본을 만들 때까지만 해도 높이를 5m로 계획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종로 폭을 100m로 확장하면서 주변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동상 규모를 크게 해야 한다는 ‘고위층’의 지시에 따라 지금 높이인 6.5m로 바뀌었다. 


당시 점토 조각은 동상을 제작한 김세중 작가(1986년 작고)의 자택 마당에서 각목과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가설작업장에서 진행했다. 동상 크기가 갑자기 1.5m 커지는 바람에 장군의 얼굴과 투구 등 상부 조각은 작업장 천장을 뚫고 진행됐다. 


동상 주조는 성수동에 있던 대광공업사가 맡았다. 어려운 경제사정으로 구리도 구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당시 이 회사 주조 기술자로 일했던 김주남씨(현 72세)와 류용규씨(현 70세)는 “처음에는 국방부에서 가져온 탄피를 사용하려 했다”며 “그러나 주물 작업이 제대로 되지 않자 탄피는 모두 버리고 해체된 선박에서 나온 엔진, 놋그릇, 놋숟가락과 같은 일반 고철을 사용했다”고 당시 기억을 더듬었다. 


이마저도 양이 모자라 한 번에 주물 작업을 하지 못하고 재료가 조달되는 대로 여러 번에 걸쳐서 작업을 한 탓에 동상 재질과 두께가 고르지 않았고 청동 고유의 색을 낼 수 없어 결국 짙은 청록색의 페인트와 동분을 섞어 표면을 칠했다고 한다.


동상 몸체는 여섯 조각으로 나뉘어 주조됐다. 동상 재료와 같은 성분의 용접봉을 만드는 기술이 없어 부산 미군부대에서 구해 온 구리 용접봉이 사용됐다. 이 때문에 동상 외부는 전체를 용접했지만 내부는 일부밖에 하지 못해 내부에 많은 균열이 생겼고 최근에는 ‘내시경’ 검사까지 받아야만 했던 것이다.


이렇듯 어려운 상황에서 2년간의 산고 끝에 마침내 당시 동양 최대 규모의 동상이 탄생했고 1968년 4월27일 광화문사거리에서 제막식이 거행됐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동상의 수리를 위해 자리를 비우자 이 기회에 동상의 잘못된 점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주장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중에서도 문화재 제자리 찾기 행동과 조계종 중앙신도회 등은 동상이 떠난 바로 그 다음날 서울시에 이순신 장군 동상에 대한 고증을 요구하는 공청회를 제안했다. 아울러 이를 위한 행정 심판도 청구했다.

 

▲  세종로  이순신 장군 동상   ©오산시민신문

이러한 이의제기는 처음이 아니었다. 오히려 동상 건립 직후인 1970년대 말부터 공론화되었다고 한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동상 설치의 동기부터 알아보자. 1968년 4월 광화문 네거리에 동상이 서게 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일제 때에 변형된 조선왕조의 도로 중심축을 복원하기에는 돈이 너무 많이 들지만 그 대신 세종로 네거리에 일본이 가장 무서워할 인물의 동상을 세우라.”고 지시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동상이 설치되고 나서부터 “이순신 장군 동상에 따른 음모”니 뭐니 하고 유언비어가 떠돌았다고 한다. 군사독재를 위해서  이순신 장군 동상은 세웠다는 등의 소문이었다. 1977년 5월엔 서울 시민들의 불만이 최고조에 달했는데 문화재 전문가들에 의해 여러 차례 고증이 잘못되었다고 지적되자 서울시가 “문화공보부 영정심의위원회”에 고증의 정확성 여부를 심의해달라고 한 것이 그 발단이 되었던 것이다.


서울시민들은 “나라를 구한 성웅의 초상을 어떻게 그리 만들 수 있냐.”라며 관계당국을 연일 성토했고 결국 서울시는 1979년 5월 문화공보부에 이충무공 동상을 다시 만들어 세우겠다는 계획을 요청해 허가를 받아냈고 동상 건립 예산으로 2억 3천만 원이 책정되었다.


그러나 그해 12월에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 이후 펼쳐진 어수선한 시국과 미술계의 조직적인 반발로 이 계획은 실행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문화재 제자리 찾기 행동과 조계종 중앙신도회 등이 제기한 문제점은 무엇인가?

▲1977년 5월 10일자 동아일보 기사   ©오산시민신문

 

첫째, 이순신 장군이 일본 칼을 오른손으로 잡고 있어 패장으로 비칠 염려가 있고 둘째, 발목까지 내려오는 중국 갑옷을 입고 있어 무인의 기상을 보여주지 못하며 셋째, 동상 얼굴이 이순신 장군 영정 사진과 닮은 구석이 전혀 없고 넷째, 동상이 놓인 기단 아래 전고(戰鼓:전장에서 쓰이는 북)가 누워 있어 패전을 의미한다는 점 등이다.


일본도를 오른손으로 잡고 있다는 첫 번째 지적 사항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이 문제의 핵심은 칼을 오른손에 들고 있다는 점인데 왼손잡이가 아닌 이상 칼을 뽑을 수 없는 자세이고 이는 항복한 장수로 오인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또한 동상의 칼은 일본도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라고 한다. 조선 칼은 상당히 큰 곡률을 갖는데 반해서 세종로 동상의 장검은 거의 직선에 가까울 정도로 곡률이 작아 이것이 일본도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동상의 칼은 일본도 혹은 일본도의 변형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이순신 동상은 전형적인 중국 갑옷을 입고 있다는 것이 두 번째 지적 사항이다. 복식 전문가들은 이순신 장군의 갑옷이 어깨 부위를 덮어쓰는 형태로 만든 전형적인 중국식 갑옷이라고 지적한다. 중국 갑옷은 피박형 갑옷으로 어깨와 가슴 부분을 보호하기 위해 어깨 위로 두르는 일종의 망토형 방호구인 것이다.


혹자는 이 광화문의 동상이 명 태조 묘 앞에 있는 무인석과 똑같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조선의 갑옷은 두루마기처럼 입는 형식이라고 하는데 임란 당시의 갑옷 실물이 경주 박물관에 있다고 한다.

 

이순신 동상의 얼굴을 놓고도 설왕설래 말이 많다. 동상 얼굴이 이순신 장군 영정과 전혀 닮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작가인 김세중씨의 얼굴과 비슷하다는 주장까지 나오기 때문이다.

 

이순신 동상 앞에 놓인 두 개의 전고(북)-전투를 지휘하는 용도-가 누워있다는 점도 비판의 대상이다.


전장에서 북은 전투을 독려하는 장수의 호령이다. 그래서 전장의 북을 ‘독전고(督戰鼓: 전투를 독려하는 북)’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광화문 동상 앞의 북은 옆으로 뉘어 있다. 이는 전장을 독려하고 군사를 호령하여 ‘불패의 신화’를 만들어낸 장군의 이미지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적군의 탄환을 맞은 뒤,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한 뒤, 조카인 이완에게 ‘계속해서 북을 쳐 전투를 독려’ 한 것은 국사 시간에 배워서 대부분의 국민이 알고 있는 유명한 내용이다.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새겨진 이순신 장군 최후의 모습, 혹은 ‘불패의 장군’의 모습을 묘사하지 못하고 오히려 북을 뉘어 ‘장군으로서 지휘’하는 모습을 형상화하지 못한 것은 최악의 실수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까지 열거한 논란의 여러 이슈들은 이순신 동상이 객관적 고증과 연구가 턱없이 부족했다는 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문화재 제자리 찾기 행동 사무총장 혜문 스님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기로 하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이순신 동상이 일본 칼을 차고 중국 갑옷을 입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도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잘못 만들어진 점을 인정하고 고치려고 했다. 이번 기회에 전문가들이 진지하게 고증에 나서 국가 상징물을 바로 잡아야만 한다”

 

▲  박근용 작가  © 오산시민신문

 

 

 

 

 

 

 


박근용 작가는 35년간 중,고등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미술교사이면서 작품을 생산하는 작가의 역할, 이

▲  네팔 스케치 여행 © 오산시민신문

두 가지를 꾸준히 해오고있다. 방학이면 인도,네팔, 티벳,몽골 등 오지를  다니면서 스케치 여행을 하고 이태리 밀라노와 네팔의 카투만두,서울의 인사동  등에서 초대개인전을 열었다. 몇년전부터는 경기도와  네팔의 현대미술가들 사이를 오가며 교류를 주선하는 일도 하고 있다. 1980,90년대에는 컴 아트 그룹의 멤버로 활동하였고 3년 전부터는 오산,화성,수원의 실험미술 작가들 주축멤버인 '매홀'그룹의 일원으로 화성시 형도, 수원 오목천동 하수종말처리장에서 영상 설치미술을 선보였다. <박샘의 '어짜다 마주친 미술'>을 통해 35년간 현장에서 미술을 가르친 경험과 여행지에서 만나는 미술을 토대로 미술관 밖 우리가 일상에서 미술에 관심을 갖도록 소통의 통로로 독자들과 만나기를 희망한다. 필자는 "미술은 심오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는 매우 친근한 것이라고."말한다.

 

박근용 작가 master@osan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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